한일간의 풀리지 않은 숙제 중 하나인 4740톤급 화물선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일본이 항복했던 1945년 8월 15일을 9일 지난 1945년 8월 24일, 오미나토항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태워 부산으로 향하던 배가 항해 도중 폭발해 침몰한 사건으로 당시 배에 타고 있던 조선인 524명 혹은 5000명 이상이 희생된 사건이다.
항해 도중 방향을 돌려 일본 마이즈루 항으로 향했는데 8월 24일에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갑자기 폭음과 함께 폭발해 침몰한 것이다.
당시 홋카이도의 일본 해군은 오미나토 항 인근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배에 태워 출항시켰는데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고의로 폭발된 것이라는 의혹이다.
일본의 전범 행위에는 위안부, 마루타, 강제징용, 등 조선을 대상으로 별짓을 다했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건외에 우키시마호에 대한 인지도는 아직 미미하다. 원인으로는 일본인 장교들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의 보복이 두려워 자폭했다는 한국 측 주장과 미군의 기뢰와 충돌하여 침몰했다는 일본 측 주장이 있다.
문제는 희생자들의 명확한 인원 파악인데 일본은 조선인 승선자 3725명, 사망자 524명, 실종자 수천여 명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주민의 목격담에 사망자만 1천 명이 넘으며 당시 생존자의 목격담에 따르면 7천 명 이상이 승선하였다고 한다. 조선인 1만 명이 넘게 승선하였고 최소 5천 명이 사망했다는 자료도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정부가 나서야 한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와 강제 징용으로 집중했던 일본의 과거사 문제는 지금이라도 우키시마호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서야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홋카이도, 아오모리, 도호쿠 등에서 강제 징용되어 노역에 시달리다가 조국으로 돌아갈 기쁨에 부풀어 있던 조선인 수천 명이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증거가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이들은 일본 해군의 계획적인 범죄라고 주장했는데 당시 조선인 징용자들을 일본에 남겨두자니 폭동이 우려되고 살려두자니 국제 사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폭발 사고로 위장해 수장시킨 것이라는 내용이다. 합리적 의심을 할만한 정황은 또 있다.
폭발 전에 일본 군인들이 문서 등의 물건들을 바다로 내던지고 이미 다수의 일본 선원들이 보트를 타고 배를 탈출하였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폭발음이 3~4회 들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기뢰가 터지는 현상과 상당히 다른 것으로 물기둥이나 기타 유사한 정황이 없었으므로 일본측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실제 침몰 이후 9년 후 1954년 일본 기업이 선체를 인양했을 당시 배의 선체가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이 내부 폭발이라는 것이고 만약 외부 기뢰 폭발로 침몰한 것이라면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더구나 출항 전 일본 승조원들은 조선인 때문에 생명을 바칠 수 없다며 위험한 구역 항해는 절대 반대한다는 규탄시위를 했다고 적혀 있으며 일본 해군 참모장이 의무를 수행해 깨끗이 목숨을 바치라고 폭탄적인 선언을 했다는 내용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대략 조선인 7,000 명에서 5,500여 명이 우키시마호에 타고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증인은 12,000여 명이 탑승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등 81년이 지난 지금까지 왈가불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승선자 명부를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한국 정부가 명부를 공개해 달라고 요청하자 일본 정부는 사망자 숫자가 256명이라고 축소 보고했다. 공식 발표에서 언급한 524명보다도 더 줄어든 숫자다.
그동안 일본은 1954년에 우키시마호의 선체를 민간 기업에게 인양하게 하면서 재일 조선인들의 사건 진상조사 요구를 묵살 했으며 인양된 선체는 아무런 조사도 없이 민간기업에 고철로 팔아 넘겼다.
인양과정에 발견된 유골 300 구도 여러 사람의 유골이 뒤섞인 것으로 밝혀지는 등 한국인에 대한 후속처리는 오만의 극치를 달린 것이다. 사건에 본격적으로 세상밖으로 나온 것은 침몰 이후 32년이나 지난 1977년에 일본의 공영방송 NHK에서 다큐멘터리 폭침이 방영되면서 부터다.
이후 15년이나 더 지난 1992년 남은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일본 법원에 일본 정부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2001년 8월 2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으나 2003년에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한일기본조약으로 보상은 끝났다며 기각 사유 중 하나를 밝혔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안일하고 미온적인 태도다.
1993년 천안에 설립된 우키시마호 진상 위원회와 2011년 부산에서 설립된 우키시마호 폭침 한국 희생자 추모 협회가 진상 규명을 촉구했을 뿐 2015년 이후로 조사를 사실상 멈춘 상태다. 흔적이라고는 비령비 뿐이다.
부산 중앙동 수미르공원에 희생자 위령비가 있고 일본에는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해안 근처의 섬에 순난의 비가 있다. 이제 생존자도 2024년 9월 기준 3명 뿐이다. 영화 중에서는 1995년 일본 영화 아시안 블루 우키시마마루사콘이 최초로 이 사건을 다뤘다.
한국에서는 2001년에야 시민단체 광주시민연대에 의해 처음으로 상영됐다. 북한 영화 살아있는 령혼들도 우키시마호에 대한 내용으로 상영됐다. 일본과 북한이 이럴 때 하국에서는 그 흔한 영화 한편 없었다. 지금이라도 생존자가 살아 있을 때 이 사건의 진상조사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인 행정력의 저력을 보여야 한다.
보상도 그렇지만 8.15 광복 이후 일본이 항복한 시점이라는 것이 더욱 문제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우키시마호는 대충 넘어갈 역사속의 오점으로 남아서는 안된다. 헛된 희생을 눈감는 것은 정부의 방관이나 묵인, 헌법에 명시된 국민 보호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덕암 김균식